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헤이그 특사 (문단 편집) === 만국평화회의 입장 실패와 연설 활동 === 만국평화회의는 6월 15일에 시작됐다. 이보다 열흘쯤 늦은 6월 24일 ~ 25일경에 헤이그에 도착한 특사는 호텔에 숙소를 정하고 숙소에 국기를 게양한 뒤 공식 활동에 돌입했다. 일본은 헤이그에서 특사들이 회의장 입장을 요구하는 모습을 보고서야 특사가 파견됐음을 알아챘다. 이들은 한국에서 헐버트를 감시했는데 헐버트가 일본까지 이동하며 일본의 눈길을 끄는 동안 특사 셋이 러시아를 거쳐 헤이그로 간 것이었다. 여기에 헐버트 역시 비슷한 시기에 시베리아 횡단 열차를 타고 프랑스 파리를 거쳐 헤이그에 도착했다. 당시 대한제국 통감인 [[이토 히로부미]]는 헤이그에서 특사가 목격됐다는 전보를 받고 노발대발하며 고종에게 찾아가 따졌다.[* 일설에 의하면 당시 이토 히로부미는 얼굴이 벌개져서 고종에게 "조선의 모든 외교는 [[을사조약]]을 지켜 우리 일본을 반드시 통해야 하거늘 이렇게 비열한 방식으로 국제 사회에서 일본을 난처하게 만들다니, 조약을 어긴 데 대한 배상금을 물어내던지 차라리 일본한테 전쟁을 선포하던지 하시오!"라고 고래고래 고함을 질렀다고 한다.] 그들은 만국 평화 회의 의장인 러시아의 넬리도프 백작에게까지 찾아가 일본의 국권 침탈을 설명하고 의장 직권으로 참석시켜 줄 것을 요구했다. 넬리도프 백작은 개인적으로는 이들을 동정했으나 이미 러시아 본국에서 '''대한제국 특사들은 절대 받아들이지 말라'''는 밀명을 내려 놓은 상황이었던 터라 결국 유야무야 말을 돌리면서 이들의 회의 참석을 거절했다. 일본은 이들이 사칭한 특사라 주장했고 회의에 들어오지 못하도록 물밑 작업으로 방해했다. 미국, 프랑스, 중국, 독일 등 열강 대표단에게도 회의 참석 협조를 요청했지만 소용 없었다. 그러던 6월 30일 헤이그 일간지 'Courrier de la conference(꾸리에 드 라 꽁페랑스)'는 특사들이 각국 대표들에게 보낸 호소문을 보도하였다. 편집자인 영국인 '''윌리엄 토마스 스테드'''는[* 최초로 신문과 잡지의 보도에 삽화를 삽입하는 보도 기법과 현재 모든 기자들이 조사를 위해 반드시 하게 되는 '인터뷰 기사' 형식을 만들어내기도 하는 등 오늘날 전세계에서 활동하는 기자들에게 지침표를 마련한 인물. 2020년 2월 23일 [[신비한 TV 서프라이즈]]에 자세한 이야기가 나왔는데 영국의 아동매춘에 대한 실태를 폭로하여 법 개정을 요구하는 등 여러모로 정의로운 행보를 보여준 기자였다고 한다. 노벨상 후보로까지 거론되었다고. 이후 1912년,다른 나라에 가기 위해 배를 탔는데 '''[[타이타닉호 침몰 사고|불행히도 그 배가 타이타닉호여서 그곳에서 생을 마감했다.]]''' 구명조끼를 다른 이에게 양보한 뒤 독서하며 최후를 맞이했다.] 주석 기사에서 특사들의 신임장은 의심할 여지 없이 황제로부터 받은 것이며 따라서 한국 대표들은 공식초청을 받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회의에 참석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에 다른 신문들도 한국 특사에 관해 보도하며 일본의 침략상을 폭로하고 한국의 입장을 알렸다. 7월 5일, 특사의 정사인 이상설이 회의장에 나가 호소문을 발표했다. >우리들은 삼가 황제의 뜻을 받들고 귀국 총통과 대표에게 눈물로써 고하나니 우리 한국이 1884년에 자주 독립국이 된 것[* 1884년은 [[갑신정변]]이 일어난 해이다. 그리고 1894년에 [[갑오개혁]]이 일어나 군주명을 중국 황제의 제후작위인 [[왕]]에서 독립적인 [[대군주]]로 바꿨고 1895년 [[시모노세키 조약]]을 통해 청은 조선이 완결 무결한 자주 독립국임을 확인하여 종주권을 잃어버렸다. 중국으로 부터 독립을 기념하는 [[독립문]]은 1897년 완공되었으며 1899년 [[한청통상조약]]을 통해 한국계 국가와 중국의 통일 왕조가 역사상 처음으로 서로 대등한 관계를 맺었다.[* 이같은 주의 내용은 과거 한국이 중국의 속국이었다는 뉘앙스를 풍기고 있는데, 이는 동아시아의 한중일 역사적 관계는 서양 방식으로 그대로 적용했을때와는 차이가 있다는 점을 생각하여야 한다.]]은 공인된 사실이고 이로써 각국과 수교를 계속해 온 것이다. 그러나 1905년 11월 17일 이후 일본이 무력으로 우리나라를 압박하여 각국에 대한 국제 교섭의 권리를 강탈하였다. > >현재 일본이 우리나라에 대해 취하는 사례를 두세 개 열거해보면, > > * 모든 정무를 우리 황제의 승인을 받지 않고 마음대로 시행하는 것 > * 일본이 육해군의 세력을 믿고 한국을 압박하는 것 > * 일본이 한국의 모든 법률과 풍속을 파괴하는 것 > >등이니 총통께서는 정의에 근거하여 처단하라. > >한국은 자주국인데 어째서 일본이 한국의 국제 교섭에 간여하여 우리나라 황제의 명을 받든 사절단이 이 회의에 참석하지 못하는가? >귀국 총통 및 대표는 위기에 빠진 약소국을 돕고 조력을 베풀어 우리 사절단을 만국 평화 회의에 참석시키고 모든 호소를 허용하기를 간절히 바란다.[* 박은식 <한국통사>, 위키피디아에서 재인용.[[https://ko.wikipedia.org/wiki/%EC%9D%B4%EC%83%81%EC%84%A4|#]]] 같은 날 윌리엄 스테드와 이위종의 인터뷰가 있었다. 이날 이위종은 매우 직설적이고 공격적으로, 국제 정치의 핵심을 꿰뚫는 거침없는 발언을 보여준다. >스테드: 여기서 뭘 하십니까? 왜 이 평화 회의에 파문을 던지려 하십니까? >이위종: 저는 아주 먼 나라에서 왔습니다. 이곳에 온 목적은 법과 정의를 찾기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각국 대표단들은 무엇을 하는 겁니까. >스테드: 그들은 세계의 평화와 정의를 구현하려는 목적으로 조약을 맺게 됩니다. >이위종: 조약이라구요? 그렇다면 소위 1905년 조약(을사조약)은 조약이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 황제의 허가를 받지 않은 채 체결된 하나의 협약일 뿐입니다. 한국의 이 조약은 무효입니다. >스테드: 하지만 일본은 힘이 있다는 걸 잊으셨군요. >이위종: 그렇다면 당신들의 정의는 겉치레에 불과할 뿐이며 기독교 신앙은 위선일 뿐입니다. 왜 한국이 희생되어야 합니까? 일본이 힘이 있기 때문인가요? >이곳에서 정의와 법과 권리에 대해 말해봤자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왜 차라리 솔직하게 총, 칼이 당신들의 유일한 법전이며 강한 자는 처벌받지 않는다고 고백하지 못하는 겁니까?''' 이 인터뷰는 이 문서 맨 위에도 있고 우리에게 잘 알려진 특사 세 사람의 사진과 함께 <만국평화회의보>에 보도되었다. 상황이 이렇게 흘러가자 특사들은 언론전으로 방향을 돌렸다. 7월 8일 저녁 각국 신문 기자단이 주최한 국제 협회에 이상설과 이위종은 귀빈으로 초대받아 연설할 기회를 얻어 이위종은 유창한 불어로 연설을 하였다. 당시 회의장 주변에는 150명 이상의 언론인과 시민 운동가들이 몰려든 상태였다고 한다. >러일전쟁 중 일본이 공언한 전쟁목적의 두 가지는 첫째, 한국독립의 유지와 영토보전, 둘째, 극동의 교역을 위한 지속적인 문호개방의 유지였다. 또한 일본의 정치가들은 이번 전쟁이 일본 자신만이 아닌 모든 민족의 문명을 위한 싸움이라고 선전하였으므로 동양에 파견된 영·미인 모두가 일본의 언명에 대한 이행을 믿었으며, 특히 한국은 일본과 동맹관계를 맺고 전쟁 수행에 필요한 모든 수단을 동원하여 지원했을 뿐만 아니라 우리들 한국인들은 오랫동안 장기집정으로 인한 부패, 과도한 세금징수와 가혹한 행정에 허덕여왔으므로 일본인들을 애원과 희망으로 환영하였다. 그당시 우리들은 일본이 부패한 정부관리들을 처벌해주고, 일반 백성에게는 정의감을 북돋워주고, 정부 당국의 정치·행정에 대해서는 진실한 조언자가 되고, 한국민들의 개혁운동을 잘 인도하여 줄 것으로 확신하였다. 일본인들은 거듭하여 그들의 한국진출을 한국의 문호개방과 모든 백성을 위한 기회균등의 보존을 공고히하기 위함이라고 극구 강조하였다. > >그러나 일본은 연승을 거두게 되자 태도를 바꾸어 추잡하고 불공평하고 비인간적이고 이기적이고 가혹한 처사를 감행하였고 지금도 여전하다. 그들의 맨 처음 요구는 한국영토의 대부분을 점하고 있는 미개간지를 하등의 보상도 없이 50년간 그들에게 양도하라는 것이었고, 두 번째의 요구는 일본황제 특사인 이토가 저들 군마보포병을 동원하여 궁궐을 애워 싼 가운데서 11월 15일에 제시한, 그들에 의해서 꾸며진 조약체결 내용을 황제가 동의하라는 것이었다. 특히 이 조약의 초안은 첫째, 한국의 대외적 문제의 관할 및 지휘는 일본에게 위임할 것, 둘째, 한국 정부는 국제적 성격의 어떠한 회합이나 약정일지라도 일본의 중개 없이는 결정짓지 않는다는 것을 서약할 것, 셋째, 서울에 일본통감을 배치할 것, 넷째, 한국 내에 일본 주재관을 임명할 것 등 네 가지로 되어 있다. > >한국황제와 대신들은 이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을 것을 결심했는데도 불구하고 이토가 이를 고집했기 때문에 황제는 이에 동의하느니보다는 오히려 죽음을 택하겠다고 선언하였다. 그러나 17일 저녁까지도 결론을 짓지 못하자 일본은 “이를 수락하지 않으면 만사에 있어서 즉각적인 파괴를 의미할 뿐이다”라고까지 위협해 왔다. 공포에 질린 대신들은 주변에서 나뭇 잎이 바스락거리는 소리만 듣더라도 일본군인들이 살그머니 옆에 접근해 오는 것으로 상상할 정도였다. > >급기야 완강히 거부하는 참정대신 한규설을 체포하여 감금한 상태에서 을사조약이 체결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일본의 정치평론가나 선전가들은 세계만방에 대하여 이 조약이 마치 한국측의 선의적이며 자진적인 양보에 의한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이와 같이 가장 우의적이며 형제적인 우호관계를 가진 체 하면서 슬쩍 상대방의 호주머니를 터는 위선가는 공개적인 강도 행위보다도 더욱 경멸해야 할 일이며 잔인한 일일 것이다. > >1905년 11월 17일 이후 일본은 공식적 비공식적으로 강탈·강도 또는 잔인한 흉계 등을 감행하였으니 이로 인한 3년간의 실질적인 손해는 구체제하 정부의 가장 잔혹한 정치가 50년간 저지른 해독보다 더욱 심한 것이었다. 이토가 일본에서 1억원(500만불)을 차관해 온 돈으로, 재한 일본인 관리들은 본토 봉급의 3∼4배를 받았고, 수도공사는 일인들의 거주지인 제물포와 서울의 日本人街에만 시설되었으며, 교육기관의 설치는 한국어를 根滅시키고 일본어를 대신 가르치려는 것이었고, 한국인의 해외유학은 반일주의를 호소·선전할 우려가 있다고 불허하였으며, 행정개혁은 유능하고 신망 있는 한국인 정치가를 축출하고 일본화한 사람들로 대치한 것에 불과하였다. 뿐만 아니라 일본정권은 개인 소유지를 군사상의 필요에서 아무런 보상 없이 박탈하였으며 화폐제도를 개혁하여 한국상인들을 파산상태로 몰아넣었다. … > >일본인들은 항상 평화를 말하지만 어찌 사람이 기관총구 앞에서 평화롭게 살 수 있겠는가. 한국민이 모두 죽어 없어지면 모르겠지만 그렇지 않은 상태에서는 한국의 독립과 한국민의 자유가 이루어지지 못하는 한 극동의 평화는 있을 수 없다. 한국 국민들은 독립과 자유라는 공동 목표에 대하여 정신적으로 결합되어 있으며, 이 목적을 위하여 한국 국민은 죽음을 무릅쓰고 일본인의 잔인하고 비인도적이며 이기적인 침략에 대항하고 있다. 여하한 행동을 해서라도 일본인과 싸우려고 결심한 2천만의 한국 국민을 대량 학살한다는 것은 일본인에게 있어서 그다지 흥미 있거나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은 사실이다. 일본은 한국의 독립과 문호개방에 대한 엄숙한 공약을 배반하였다.(YE WE CHONG, "A Plea for Korea" The Independent, Vol. LXⅢ, New York, 1907년 8월호) >---- >[[http://contents.history.go.kr/mobile/nh/view.do?levelId=nh_043_0020_0030_0030|출처]] 미국 공사, 유럽 공사, 러시아 공사를 역임한 이범진의 아들 이위종의 활약은 특사 일행에게 큰 도움이 되었다. 이위종은 아버지를 따라 미국, 러시아에서 지낸 경험 덕분에 [[영어]], [[러시아어]]에 능통할 뿐만 아니라 프랑스에서 초급 장교 훈련을 받은 바 있어 국제 외교가에서 공식 언어로 통하던 [[프랑스어]]도 구사할 수 있었다. 당시 [[한국인]]들 중 서양 3개국 언어를 사용할 수 있는 사람은 이위종뿐이었다. 이 자리에서 이위종은 세계 각국의 기자들을 상대로 '한국의 호소'라는 제목의 성명을 발표해 [[을사조약]]의 부당함과 일본의 한국 침략을 규탄했다. 이 연설문 전문은 스테드에 의해 <만국평화회의보>에 게재되었고 기자단 사이에서는 즉석에서 만장일치로 한국을 동정한다는 결의문을 통과시키는 등 언론인들과 운동가들에게 깊은 인상을 줬다. 게다가 서구 언론은 이위종을 '한국의 프린스' 쯤으로 보도했다. 이위종이 [[전주 이씨]]였기 때문인데 사실 이위종은 '낙동염라' [[이경하]]의 손자로 [[광평대군]]파였다.[* 이준 역시 이성계의 형인 완풍대군 [[이원계]]의 후손으로, 전주 이씨다. 이상설은 [[경주 이씨]].] 연설에 대한 반응은 만족스러웠다. 이위종의 위 연설이 헤이그에서 발행되던 《Haagsche Couront》에 게재되는 등 각국 언론들의 주목을 받았고 대한제국을 지지하는 성명서가 만장일치로 채택되긴 했으나 상황이 달라지진 않았다. 당시는 [[유엔|국제연합]](UN)이 없던 시절이라[* 유엔은 2차 대전 이후 창설되었다.] 힘의 논리가 세계를 지배하고 있어 측은한 반응을 보일 뿐 거기까지였고[* 오늘날에도 중국의 압력으로 외교적 고립에 직면한 대만이 비슷한 처지에 놓여 있다. 주요 국제기구 총회가 열릴 때마다 중국의 반대에 부딪혀 번번이 대만 대표들의 참석이 거부당하는 일이 해마다 되풀이되는 실정이다.] 심지어 이들을 적극적으로 지원하고 지지한 것처럼 보였던 영국인 윌리엄 스테드 역시 일본을 비난하는 것은 원하지 않았는데 1904년의 [[영일동맹]] 때문이다. 한편 친한파라고 알려진 일본 특파원은 직함이 언론인이었을 뿐 실은 일본 대사의 첩보 요원 노릇을 하고 있었다. 따라서 이들의 행동은 실시간으로 일본에 유리하게 왜곡되어 한국에 전달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